오토 대제

하인리히 1세와 선왕 콘라트 1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둘 다 국왕 선거로 뽑힌 왕이다. 이는 얼핏 혈통보다는 정치와 실력으로 누구나 국왕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리지만 모순적이게도 독일 왕은 무엇보다도 혈통 중심이었다. 국왕 선거는 게르만의 오래된 관습이지만, 이 선거에 나설 수 있는 후보자는 전왕의 혈연자로 한정되었다. 그리고 전왕은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 선거는 새로운 왕이 그저 전왕의 혈연자라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모두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분은 중요한가 보다. 비슷한 예로는 조선시대 단종과 수양대군의 예를 들 수 있겠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조선의 실질적인 왕이었다. 자기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정당성과 형식 때문에 수하인 한명회와 권람을 시켜(혹은 정황상 신하들이 알아서)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라고 단종을 겁박한다. 수양대군은 왕위를 물려준다는 단종의 거듭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받게 된다.

하인리히 1세와 아내 마틸다
하인리히 1세와 아내 마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듯이 아무리 국왕 선거가 형식에 불과하더라도 진짜 선거다운 선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선왕의 혈통이 끊어졌을 경우나 전왕이 지명한 후계자가 국왕이 되기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을 경우다. 실질적인 독일 왕국의 시작인 콘라트 1세 때는 전왕 루트비히 4세가 혈통이 없이 죽어서 왕으로 선출되었고 하인리히 1세는 콘라트 1세가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독일 왕이 되었다. 그리고 하인리히 1세는 929년 둘째 아들 오토(Otto)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한 후 작센과 프랑켄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왕위에 올랐다.

하인리히를 지칭하는 말 중에 라틴어로 "Primus inter pares"라는 말이 있다. '동료 중 일인자'라는 뜻으로 하인리히는 독일 왕임에도 불구하고 대공을 지배하는 자가 아닌 '여러 대공 중 일인자'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태생이 작센 공작이라 그런지 아니면 여러 공작들의 반란을 진압하다가 제 명대로 못 산 선왕 콘라트 1세의 참상을 두 눈으로 몸소 겪어서 그런지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여러 대공 중 일인자' 하인리히 1세는 다른 공작들과 분쟁을 감수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대신 평화로운 연맹 체제를 선호했다. 반면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독일 왕위에 오른 이른바 오토 1세, 혹은 오토 대제(독: Otto der Große, 영: Otto the Great)라고 후세에 불리는 오토는 부왕과는 달랐다.

오토는 대관식을 통해 자신이 다른 대공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936년 독일 아헨(Aachen)에서 마인츠 주교의 집전 아래 오토의 대관식이 열렸다. 다른 4대 대공 - 바이에른, 슈바벤, 프랑켄, 로트링겐 -이 오토의 개인적인 수행원 역할을 했다. 먼저 아헨이 로트링겐 공작령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길베르트 로트링겐 공작은 대관식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담당했다.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는 연회를 담당하고, 슈바벤 공작 헤르만은 컵을 운반하는 직책을 맡았다.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 1세는 말을 감독하고 캠프를 만들 장소를 정하고 관리했다. 대공들이 이런 직책을 맡음으로써, 대공들은 새로운 왕에게 복종하고 협력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오토 1세에 대한 다른 공작들의 태도는 선왕 콘라트 1세, 하인리히 1세 때와 확연히 달라졌다. 위 두 왕은 즉위한 직후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다른 공작들과 치열하게 싸웠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렇게 해서 오토 1세는 평화롭게 독일 왕국을 다스렸답니다"라는 말로 끝날 듯 싶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형제들과 다툼이 새로운 왕의 발목을 잡았다.


앞서 1편에서 프랑크 왕국에 대해 짧게 설명한 적이 있다. 현재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현재 서유럽 대부분을 프랑크 왕국의 기치 아래 통일시켰던 카롤루스 대제(프: 샤를마뉴, 독: 카를, 영: 찰스)가 죽은 후 베르됭 조약을 통해 넓은 왕국이 세 개의 왕국(동/중/서 프랑크 왕국)으로 쪼개졌다. 동양이나 로마 제국과는 달리 게르만족에게는 토지와 재산을 남자에게 균등하게 상속하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 때문에 게르만족이 지배하던 서유럽은 상속으로 나라가 쪼개졌다 합쳐지는 일이 빈번했다. 하인리히 1세는 자신의 사후 이 관습 때문에 왕국이 쪼개질까 우려하였다. 이에 하인리히는 929년 둘째 아들 오토를 독일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언하고 모든 토지와 재산은 오토가 물려받도록 정했다. 이른바 장자 상속제를 명문화함으로써 향후 독일 왕국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왕국이 분열되지 않기를 바랐던 부왕 하인리히의 희망과는 달리 오토의 동생인 하인리히는 분할 상속 관습을 들어 자신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힘을 실어준 이는 다름 아닌 오토와 하인리히의 어머니인 마틸다였다. 마틸다는 작은 아들 하인리히를 편애했는데 결론적으로 마틸다의 편애가 두고두고 큰 아들 오토를 괴롭히게 된다.

하인리히 1세의 가계도

맨 위가 하인리히 1세와 마틸다. 그 아래 열은 왼쪽부터 게르베르가, 오토 1세, 하인리히(출처: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일부 수정해서 사용)

이복형 탕크마르(Thankmar)도 오토에 등을 돌렸다. 하인리히 1세가 '장자 상속제'를 명문화했는데 오토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 - 즉 오토가 제일 맏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장자'가 될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지실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겠다. 사실 하인리히 1세가 서른 살이었던 906년, 메르세부르크(Merseburg) 백작 에르빈(Erwin)의 딸 하테부르크(Hatheburg)와 결혼해서 아들 탕크마르를 얻었다. 하지만 하테부르크는 이번이 두 번째 결혼이었다. 당시 여자의 중혼은 한국의 조선시대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오토 1세의 누이 게르베르가도 로트링겐 공작 기셀베르트와 결혼 후 프랑스의 루이 4세와 결혼했으며 오토 1세도 늘그막 한 나이에 20대 미망인과 혼인한 적이 있다. 다만 하테부르크의 경우 문제가 되었던 게 하인리히 1세와 결혼 당시 하테부르크는 수녀였다는 게 큰 문제였다. 교회에서는 하테부르크가 첫 결혼 후 남편과 사별하고 수녀가 되었고, 수녀 시절의 순결 서약이 아직 유효하다면서 혼인 자체를 위법으로 보았다. 결국 두 사람은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하테부르크는 다시 수녀가 되었고 하인리히는 베스트팔리아 백작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게 되었다. 따라서 탕크마르는 적통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하인리히의 둘째 아들인 오토에게 후계자 자리가 넘어갔던 것이다. 12세기에 작성된 오토 왕조의 족보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인리히 1세의 후계자들의 얼굴이 그려진 오토 왕조의 족보의 어디에서도 탕크마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상속 문제 때문에 하인리히와 탕크마르는 오토에게 불만은 있었지만 오토가 즉위하자마자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오토는 즉위 후 헤르만 빌룽(Hermann Billung)을 작센 서북쪽의 변경백으로 임명했는데 이 인사가 뜻하지 않게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변경백 게로

'변경백(邊境伯)'이란 독일어로 Markgraf라고 하는데, 이는 변경(Mark)과 백작(Graf)이 합쳐진 단어다. 영어의 Margrave의 어원도 이 Markgraf이다. 변경백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 지대를 다스리기 위해 임명되었는데 다른 백작과 크게 다른 점은 군사권뿐만 아니라 변경백이 관할하는 지역 내에서 행정권과 사법권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경백의 제일 중요한 역할은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선제공격도 가능했기 때문에 능력이 되면 얼마든지 영토를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 이 때문에 변경백은 다른 백작보다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의 통치 기틀이 확립되면 보통 행정/사법/군사권이 나눠지기 마련이지만 군사적인 압력을 심하게 받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통치 효율성을 위해 예외적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원스탑 서비스로 처리하는 직책이 생기곤 했다. 물론 변경백은 신성 로마제국 고유의 직책이지만 동서양을 살펴보면 이와 비슷한 직책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 단골 시험 문제였던 고려의 행정구역을 떠올려보자. 고려는 현종 때 전국을 5도 양계(五道 兩界)로 나누었다. 양계는 거란의 군사적 위협이 큰 평안도 지역(북계)과 여진족과 분쟁이 잦은 함경도 지역(동계)을 말하며 이 양계에 파견되는 관리가 병마사(兵馬使)다. 병마사는 군사권뿐만 아니라 행정권도 가지고 있었다. '안사의 난'으로 유명해진 안녹산(安祿山) 역시 당나라가 돌궐을 막기 위해 북쪽에 파견되어 있는 절도사였고, 이 절도사 역시 병마사처럼 해당 지역의 군권과 행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오토는 즉위 직후 헤르만 빌룽(Hermann Billung)을 작센 서북쪽의 변경백으로 임명했다. 당시 작센의 서쪽은 슬라브족과 교전이 잦은 지역이었다. 이 인사는 헤르만의 형 비히만(Wichmann) 백작의 심기를 건드렸다. 비히만은 자신이 동생인 헤르만보다 더 나이가 많고 부유하기 때문에 변경백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비히만은 선왕 하인리히 1세의 아내 마틸다의 누이와 결혼한 사이였다. 헤르만보다는 좀 더 "로열 패밀리"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심기가 불편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지 알고도 모른 척했는지 오토는 937년 작센 서쪽 변경백인 지크프리트(Siegfried)가 죽자 지크프리트의 동생인 게로(Gero)에게 변경백 작위를 계승시켰다. 이는 또 한 사람을 화나게 했는데, 오토의 이복형이자 지크프리트의 사촌인 탕크마르였다. 탕크마르 역시 비히만처럼 자신이 변경백이 되기에 더 적합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까지 잠재적 반란자들은 늘어갔다.

맨 위의 노란색이 작센 공작령, 그 오른쪽이 헤르만이 임명된 변경백(MARCH OF BILLUNGS) 그 아래가 게로가 임명된 변경백 (출처: 위키피디아, Public Domain)

프랑켄 공작도 오토에게 등을 돌렸다. 계기는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지대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이었다. 브루닝(Bruning)이라 불린 작센의 귀족은 프랑켄 공작령과 작센 공작령 사이의 경계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지방 귀족이었다. 브루닝은 자신은 작센인이 아닌 귀족의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며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생겼다. 비두킨트의 사료에 따르면 당시 작센 인들은 자신의 공작이 왕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굉장히 컸다. 화가 난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전전왕 콘라트 1세의 동생. 참고 : 2편 3편)은 브루닝을 공격, 헬메른(Helmern) 성의 주민을 모두 죽이고 성을 불태웠다. 오토는 독일 왕으로 이 사건에 개입, 양 측을 자신이 머물고 있던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불렀다. 오토는 에버하르트에게 100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여기에 덧붙여 에버하르트 휘하의 지휘관들에게는 개를 끌고 마그데부르크의 모든 거리를 다니라는 형벌을 내렸다. 이를 독일어로 'Hundetragen'라고 하는데 당시 귀족으로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Hundetragen (© Stadtmuseum Berlin | Foto: Michael Setzpfandt, Berlin)

사실 에버하르트가 주제넘은 행위를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에버하르트 입장에서는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형인 콘라트 1세의 뒤를 이어 자신이 왕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형의 유지를 받들어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독일 왕위를 물려줬다. 게다가 프랑켄 공작에 오르고 나서도 하인리히 1세를 끝까지 지지했고, 이에 하인리히도 에버하르트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단적인 예로 하인리히 1세가 로트링겐 지방을 점령한 직후 2년 동안 에버하르트에게 로트링겐 지방의 섭정을 맡기기도 했다. 현재 독일 왕인 오토의 즉위에도 프랑켄 공작의 지지가 큰 힘이었다. 그렇지만 오토는 에버하르트에서 100파운드의 벌금과 수하들에게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참고로 당시는 1파운드가 20 실링(shilling)였고, 칼 한 자루가 5실링이었기 때문에 벌금 100파운드는 검 400 자루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얼마나 부유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독일의 5대 공작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라고 예상해본다. 문제는 자신의 상처 입은 자존심일 테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 잘 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서운함이 크지 않았을까.

반란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건은 새로이 바이에른 공작이 된 에버하르트의 반란이었다. 937년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Arnulf)가 죽었다. 오토의 대관식에서 말과 캠프를 담당했던 바로 그 공작이다.(참고 : 7편) 바이에른 공작직은 아들인 에버하르트가 이어받았다.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와는 동명이인인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는 즉위 후 자신의 아버지와 오토의 아버지 하인리히가 맺었던 평화조약(참조 : 3편)에 이의를 제기하고 오토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반란이었다. 이와 동시에 오토에게 서운한 감정이 많던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 작센 서북쪽 변경백 헤르만의 형 비히만과 마인츠(Mainz)의 대주교 프레드릭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반란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938년은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분기점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공작들에게 패하거나 약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남은 치세 동안 공작들을 제어하기가 힘들어진다. 오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꽤 컸다. 독일 5대 공작(작센, 바이에른, 프랑켄, 슈바벤, 로트링겐) 중 바이에른 공작과 프랑켄 공작이 반란에 가담했다. 오토의 칼 끝은 바이에른으로 먼저 향했다. 938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원정을 통해 바이에른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를 공작 직위에서 끌어내리고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의 삼촌 케른텐 변경백 베르톨트를 새로운 바이에른 공작에 임명했다. 베르톨트는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바이에른의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참고로 케른텐은 영어로 Carinthia, 독일어로는 Kärnten로서 현재 오스트리아 일부 지방이다.

한편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 비히만 백작(8편 참고)과 연합한 탕크마르는 대군을 움직여서 벨레케(Belecke)에 있는 요새를 공격했다. 벨레케는 현재 독일의 중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바스타인(Warstine) 근처에 있는 곳이다. 벨레케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 역사에 기록이 남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라던가 대도시는 아니었다. 다만 이 요새에는 향후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귀중한 사람 - 오토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하인리히가 머물고 있었다.(여담이지만 바스타인은 요즘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파는 맥주 바스타이너(Warstiner)의 원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belecke 위치. 좌측에 도르트문트, 쾰른. 우상단에 하노버가 있다.

탕크마르는 벨레케 전투에서 승리, 왕의 친동생을 손에 넣었지만 그 반대 급부로 슈바벤 공작 헤르만이 확실하게 적으로 돌아섰다. 벨레케 전투에서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의 친척이자 슈바벤 공작의 사촌인 게브하르트(Gebhard)가 탕크마르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것이다. 슈바벤 공작 헤르만은 백작 시절부터 오토 왕조에 충성스러웠고 그래서 공작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오토 왕조에 반기를 드는 반역자들을 앞장서서 처단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좀 복잡했다. 이번 반란의 중심에는 자신이 속해있는 콘라드 집안의 최고 연장자인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르만은 분명 갈등했을 것이다. 다만 벨레케 전투에서 게브하르트가 전사함으로써 헤르만의 갈등은 확실하게 정리되었다. 게브하르트의 전사로 인해 프랑크(독일) 지도자들이 분열되었다는 사료를 볼 때, 사촌인 게브하르트가 전사한 후 헤르만은 확실하게 반 에버하르트, 친 오토로 돌아섰다.

한편 탕크마르는 에레스부르크(Eresburg) 성을 장악하고 여기에 많은 주둔군을 상주, 향후 반란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왕의 동생 하인리히의 신병은 프랑켄 공작 에버하르트가 책임졌다. 하지만 기세 좋던 탕크마르의 반란은 에레스부르크에서 끝났다. 에레스부르크 점령 즈음 반란의 한 축이었던 비히만이 오토에 복종하고 오토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껴 대군을 이끌고 에레스부르크로 다가오고 있었다. 탕크마르는 당연히 공성전을 대비했지만 에레스부르크의 주민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가 왕인 오토였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왔음을 알고 몰래 성문을 열고 왕의 군대를 에레스부르크로 끌여들였다.

938년 7월 28일, 오토의 군대는 에레스부르크로 진입했다. 탕크마르는 에레스부르크 성 안의 교회로 도망쳤다. 동생 하인리히의 부하들이 탕크마르의 뒤를 쫓았다. 탕크마르는 무기와 금 목걸이를 내려놓고 제단 옆에 서있었다. 이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다는 의미 - 즉 항복의 의미였다. 하지만 주군의 복수에 혈안이 된 하인리히의 수하들은 탕크마르를 용서하지 않았다. 티아볼트(Thiabold)라고 하는 병사는 창으로 탕크마르의 등을 찔렀다. 탕크마르로서는 의외의 기습이었지만 티아볼트의 바람대로 얌전히 죽지 않았다. 비두킨트의 사료에 따르면 탕크마르는 비록 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용맹하고 수많은 전쟁터를 헤쳐온 사람이었다. 창으로 탕크마르를 찌른 티아볼트는 탕크마르의 반격에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 순간이었다. 탕크마르 뒤에 있던 창문이 깨지면서 창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그 창은 다시 한번 탕크마르의 등에 꽂혔다.

또 한 번의 반란

탕크마르의 죽음은 중세 독일의 관례에 비추어볼때 이례적이었다. 반역자라면 3족을 멸했던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중세 독일은 반역을 해도 고위 귀족이면 작위를 박탈할지언정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탕크마르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작센 연대기에서 오토가 탕크마르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기록에 비추어볼때 오토도 탕크마르를 죽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 계속 오토의 어머니인 마틸다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마틸다는 왕위를 동생 하인리히에게 주고 싶어할 정도로 하인리히를 편애했다. 탕크마르가 동생 하인리히를 감금했을때 마틸다의 노여움을 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에레스부르크 공성전에 참가하는 동생 하인리히의 수하들에게 몰래 탕크마르 살해를 사주한게 아닐까.

이로서 반란을 일으킨 4대 중추 세력이었던 비히만 백작, 에버하르트 바이에른 공작,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 오토의 이복 형 탕크마르 중 비히만 백작은 오토에 투항했고 에버하르트 바이에른 공작은 오토에게 군사적으로 제압되었고, 탕크마르는 전투 중 목숨을 잃었다. 남은 반란 세력은 오직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밖에 없었다. 왜 오토가 아니라 동생 하인리히인지 모르겠지만 에버하르트는 체통을 던져버리고 동생 하인리히의 발 밑에 엎드려 용서를 구걸했고 결국 살아남았다.

이쯤 와서는 한국 독자들의 이해심이 아마 한계에 이르렀으리라. 중국과 한국, 일본 같은 국가에서는 왕위를 위해서라면 설사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던 제거해버리는게 일상이었다. 중국에서는 이세민이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살해한 일이 있었으며 조선 초기 태종도 형제의 난을 일으키면서까지 왕위를 차지하고자 혈안이었다. 이게 당연한 사고방식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반란을 일으킨 동생 하인리히를 용서하고, 공작들을 용서하는데 더하여 기존 작위까지 유지해주는게 말이 안되는 일이다.

반란은 여진은 계속 이어졌다. 다음 해, 이번엔 기셀베르트 로트링겐 공작과 동생 하인리히에게 용서받아서 목숨과 작위를 유지한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 그리고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오토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기셀베르트의 배신은 오토 1세로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로렌 지역은 서 프랑크 왕국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에 공작이 동 프랑크 왕과 갈등이 있으면 손바닥 뒤집듯 서 프랑크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곤 했다. 이번에도 오토에 반기를 들면서 서프랑크 왕국 루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해버렸다.

오토는 다시 이 반란에 참여한 세력을 살펴 볼때 어찌보면 지난 해(938)에 일어났던 반란과 비등할 정도로 큰 반란이었으나, 이번 반란은 주동자 기셀베르트 로트링겐 공작과 에버하르트 프랑켄 공작의 어이없는 전사로 1년도 못가 끝이 났다. 939년 가을, 기셀베르트와 에버하르트는 수확철을 맞아 라인강 중류 지방을 약탈하고 있었다. 939년 10월 2일, 두 공작은 약탈품을 가지고 라인강변의 안더나흐(Andernach)에서 강을 건넜다. 두 공작은 후미에 남아 있었고 군대와 약탈품을 먼저 강 건너로 보내고 있었다. 강 너머로 넘어간 군대의 수가 훨씬 많아졌을때였다. 슈바벤 공작의 형제인 우도(Udo)와 우도의 사촌인 콘라트 쿠즈볼트(Konrad Kurzbold)가 기습공격을 가했다. 에버하르트는 전투 중 전사했고, 기셀베르트는 도망치는데 성공해서 간신히 강 저편으로 가는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배에는 기셀베르트 외에도 많은 군사들이 타고 있었다. 무게를 감당 못한 배는 곧 침몰, 기셀베르트 공작은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그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 반란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토의 권위에 반항하는 세력은 없어졌다. 모든 반란을 진압한 오토는 자신의 가족을 공작에 임명하면서 친정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토는 가족들에게 영지를 맡기면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믿었다.